애인은 독서왕

편집자주: 이 글은 도서사기감시단의 모 회원이 2019년 6월에 쓴 초단편 소설입니다. 재치 있는 풍자로 당시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는데, 7개월 뒤에 벌어질 일을 예견한 것으로 드러나 놀라움을 더했습니다.


여자는 책을 좋아했다. 신간이 나오면 체크해 두었다가 흥미가 가는 작품을 골라 꾸준히 샀다. 매일 자기 전 30분씩은 꼭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주변인들은 여자의 취미가 독서라는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랐다.

이야, 취미가 독서라는 말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그, 왜 우리 어렸을 때 학교에서 자기소개 하는 시간에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어? 교탁 앞에 나가서 발표하고 그랬잖아. “제 취미는 독서입니다.” 와, 나 독서가 취미인 사람 처음 봐.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책을 좋아하신다구요. 좀 차분하신가봐요. 차분한거 좋죠....음...하하하하. 저도 예전에는 책을 몇 권 읽었어요. 누구였더라....아, 베르베르 베르나르! 베르나르 베르베르 인가? 아무튼 그 뭐였더라....개미 있잖아요! 개미! 개미 재밌었죠. 개미...하하하 개미. 근데 혹시 야구는 안 좋아하세요?

그 후로도 몇 번인가 거쳐간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언젠가부터 이상형이라고 하면 줄줄이 떠올리던 여러가지 조건들의 맨 앞에 ‘자신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 이라는 것을 놓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책을 읽는 사람은 겨울철 복숭아만큼 귀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봤으면..... 그런 여자였으므로 어쩌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남자를 처음 만난 곳은 대형서점의 서가였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까지 둘의 사이에는 1 미터 이내의 근접한 공간을 점유한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었다. 그러니까 남자가 책장에서 뽑아낸 책을 들고 지나가다 팔꿈치로 여자의 한 쪽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쳐서 그녀가 입고 있던 흰 블라우스에 갈색의 얼룩을 만들기 전까지는.

남자는 출판 마케팅 회사에 다니며 독서모임의 리더로까지 활동하는 아주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독서왕. 마치 고전 소설이나 영화와 같이 책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는 숙명과도 같았던 그 장면!!!!

그러나 금세 연인이 된 둘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세번째 만남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맨날 읽는 소설들 대신 좀 훌륭한 책을 읽어보는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내심 기분이 상했지만 다양한 책을 읽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으로 넘겼다. 남자가 건넨 것은 여자도 두어번 이름은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학자의 경영전략과 혁신이론이 담긴 <스테이블>이란 책이었다. 남자의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책은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언스테이블과 스테이블한 상태를 나누어서 우리 인생에 지침을 주는 책이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전 그냥 완전 언스테이블한 인간에 불과했었어요. 그냥 쓰레기였죠. 이걸 읽음으로써 비로소 스테이블한 인간으로 거듭났답니다.

아니 무슨 책 한 권 읽고 그렇게까지....란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책을 많이 읽은 남자가 하는 말이므로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여자는 그때 남자의 눈동자가 지나치게 반짝거린다는 생각을 애써 지워버렸다. 그러나 그날 이후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스테이블’이란 단어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

아, 오늘 같은 행동은 너무 언스테이블 했던 것 같아요. 좀 더 스테이블한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말하는 사람은 남자였고, 여자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그런 대화를 한 밤이면 남자는 스테이블과 언스테이블이라는 말이 잔뜩 나오는 동영상이나 글의 링크를 몇십개씩 보내오곤 했다. 여자는 뭔가 조금씩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오래 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읽고 감명받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책을 너무 좋아하니까 그럴 거야. 워낙 발전적이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은 어느 휴일, 남자는 훌륭한 강연이 있다며 함께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여자를 이끌고 갔다. 휴일에 뭔 강연까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아직도 생각이 언스테이블 하시군요! 그렇게 하다가는 평생 스테이블한 방향으로 갈 수가 없어요! 훈계를 들을까 싶어 꾹 참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경험상 남자와 한 번 언쟁이 붙으면 계속 스테이블과 언스테이블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머리가 돌아버리기 전에 가능하면 언쟁을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터였다. 아예 헤어지는 방법도 있었지만, 저것만 빼면 괜찮으니까... 아직까지는 어렵게 만난 이상형을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았던 여자가 나름 강구해낸 대책이었다.

천여명이 들어찰 법한 강연장에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꽉꽉 차 있었다. 강연이 시작되자 한 남성이 걸어들어왔다. 여자는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남자가 매번 보내오던 동영상 속 인물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로 인사를 했고 엄청난 박수소리가 강연장을 가득 메웠다.

안녕하세요! 힘돌이 여러분!

힘...힘돌이...? 힘돌이가 뭐지? 당황하고 있는 여자의 귀가에 남자가 속삭였다. 힘들어도 돌멩이처럼 꿋꿋하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에요. 여자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힘들어도 돌멩이처럼 꿋꿋하게 라니....대체 무슨 말이야!!!

그 뒤에도 알 수 없는 처음 듣는 말이 잔뜩 나왔지만 못 알아듣는 것은 여자 뿐인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으로 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역시 여자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정신없이 강연에 빠져든 상태였다.

여자는 강연의 내용이 남자가 평소에 하는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는 데에 놀랐다. 스테이블과 언스테이블. 언스테이블에서 벗어나서 스테이블을 향해 가라! 그것을 위해서는 열독만이 살 길이다! 아직 너는 언스테이블한 존재지만 노력하면 스테이블해 질 수 있다!

강연자는 자신이 책을 읽지 않았던 과거에 얼마나 한심한 인물이었는지, 총 몇 권의 책을 읽고 스테이블한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는지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강연에 참석한 여러분에게는 자신이 이번에 쓴 신간을 특별히 저자 할인가에 공급할테니 나가는 길에 1만원씩 내고 받아가라며, 대신 집에 돌아간 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서평을 남기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날 밤 여자의 SNS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오늘 남자친구의 권유에 무슨 강연에 다녀왔는데 으....완전 찝찝.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데 걸려든 기분인데. 지들끼리 힘돌이 힘돌이 하는 것도 웃기고 말끝마다 그놈의 스테이블 언스테이블. 무슨 사이비 종교단체인 줄 알았네. 아....남자친구만 아니면 진짜 중간에 나오고 싶었다. 억지로 책 한 권 샀는데 완전 강매당한 기분이고 펴보니까 내용도 완전 각종 자기계발서 짜깁기 같은데....하아...나만 그렇게 느낀건지 내가 이상한 사람인건지 정말 답답하다.”

그러나 여자는 글을 올리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남자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남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SNS에 올린 글 봤는데요....정말 실망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이나 알아요? 그 책이 어떤 책인 줄이나 알아요? 지금까지 그런 생각으로 절 만나오신 겁니까? 짜깁기라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엘리트적인 시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하아...그 분이 어떤 분인데 진짜! 정말 실망입니다! 제가 진짜 좋게 봤었는데....진짜 좋은 분인 줄 알았는데.... 다시는 저를 볼 생각을 하지 마세요! 후....진짜 그리고 이 정도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제가 진짜, 원래 진짜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진짜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좀 더 스테이블해지려고 노력한 결과 이렇게 된 거죠. 하아....진짜 가능성이 좀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

여자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스테이블과 언스테이블의 향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그날 밤 남자의 SNS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죽을 때까지 나는 '배우는 존재'다.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더라도 '배움'이라는 것이, 아무리 별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도 누군가가 자신을 불태워 내게 전달하길 원하는 한권의 '책'이 내게 주는 그 커다란 충만함을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을 종교라 한다면 무신론자인 나는 이 종교를 믿겠다. '신뢰'라는 커다란 짐을 한없이 짊어 지면서도 이것을 나누면서 이 신뢰가 주는 무거움을 함께 짊어지고 갈 사람들을 찾아 내겠다는 신념. 이것이 교리라면 나는 이것을 실천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사이비'가 아니다. '책'을 읽되 그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책'에 대한 '배신'이 될 것이다.

배웠다면 배운대로 행동하겠다.
이 마음이 변치 않도록 지켜주소서.”

여자는 그날 밤 조용히 남자의 번호를 삭제하고 SNS에서는 차단했다. 그 뒤로 다시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끝-


편집자주: 소설이 나온 지 7개월이 지난 2020년 1월에 이런 기사가 보도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체인지 그라운드’ ‘인생공부’ 등 십여 개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며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신영준 씨가 1월 17일 천안시에 소재한 S사의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욕설과 비난을 쏟아냈다.

“니네는 독서를 존나 안하기 때문에 교양이 존나 없어. 왜? 우리나라 문해력이 2급이야 존나 개무식해. 토론을 하고 아니 책을 읽고 토론이 안돼. 니네는 독서를 내가 안하는 걸 존나 알아. 왜냐면 출판업을 하기 때문에. 존나 개병신이야. 근데, 솔직히 내가 여자애들한테 얘기하는데 남자애들이 여자애들보다 훨씬 나아. 여자애들이 읽는 책 남자애들이 읽는 책 내가 정확히 알고 있거든. 남자애들은 그래도 인생에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읽어. 여자애들은 재미로 읽는 책만 되게 많이 봐. 독서량은 여자애들이 많을지언정, 읽는 책은 예를 들어 조던 피터슨 책 <인생 12가지 법칙> 20대 남자애들은 읽는데 여자애들은 안읽어. 그래놓고 페미니즘 외치는거야. 개소리하지마. 어림도 없어. 그 <82년생 김지영> 좋은 책인데 제목만 바꾸면 돼 <62년생 김복자>로. 그러니까 82년생, 내가 82년생이거든? 그런 일 여자애들이 겪은 적이 없어. 그런게 여러분을 속이고 선동하고 기만하는 거야. 우리 엄마가 그랬다면 내가 눈물 존나 흘리겠어 진짜. 왜냐면 아저씨가 딸이 있기 때문에 되게 페미니스트야 엄밀히 말하면.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페미니스트 말을 입에 담기도 싫어. 다 왜곡돼 있어. 여성우월주위. 여성 그 뭐랄까. 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감 이런 걸로.”

“독서를 해도 그냥 하면 안돼. 우리 체인지그라운드 애들이 추천하는 책을 읽어. 우리책 읽는 사람들 내가 1년 동안 지켜봤거든. 다 존나 천재되고 있어. 다 조기진급하고, 다 존나 똑똑해지고. 그래서 뽑히기가 힘들어. 경쟁률이 너무 치열해갖고. 어른들도 존나. 우리 독서모임 들어오려면 공부 존나 열심히 해야 해. 무료여갖구. 유료보다 더 좋거든. 그거 들어와야 돼 니네. 거기 들어오면 인생 성공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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