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어휘 학습 어떻게 할까?

[특별기고: Joyce Park/영어교육가]

“어휘 분야는 영어교육 중에서도 코퍼스와 여러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지난 십수 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어요. 어휘 분야가 특히 그렇기는 하지만, 여러분, 영어교육도 과학이에요. 영어교육학자들도 실험하고 재현하고 학자들의 컨센서스를 얻어 결론을 도출해요. 그러니까, 부디, 리서치 결과로 굳어진 것들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이미 수천 번의 실험과 재현으로 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결과치라는 게 있어요. 시장의 사짜들 말 듣지 마시고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어휘 학습에는 여러 가지 이슈가 있어요. 많은 경우에 무엇을 어휘(vocabulary)라고 부르는가부터 시작하지만, 이 부분까지 포함하면 너무 길어지므로 어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부터 시작할게요. 짧게 얘기하면 '어휘 지식(vocabulary knowledge)'의 문제인데, 이 문제는 다시 두 개의 하위 범주로 나뉘어요. 첫째는 얼마나 많은 어휘를 알아야 하는가 하는 size의 문제이고, 둘째는 하나의 어휘에 대해 무엇 무엇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하는 depth의 문제예요.

1. 어휘 지식의 Size

몇 개의 어휘를 알아야 대학에 진학해 무리 없이 학업을 따라갈 수 있는가? 몇 개의 어휘를 알아야 일반 문학 소설들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가? 이런 게 바로 어휘 size의 문제예요.

어휘 리스트는 이쪽 연구에서 만들어요. 최초의 리스트는 1953년 Michael West가 만든 제너럴 서비스 리스트(General Service List)로 2,000개의 headword로 구성돼 있어요. (headword란 단어는 컨텍스트마다 의미가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한 word family group의 대표어를 말해요.) 이 리스트에는 원어민이 일상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인 어휘가 나열돼 있어요.

이후 코퍼스(말뭉치)를 돌리기 시작하면서 Averil Coxhead의 Academic Word List(AWL)가 나왔고, 여기에는 General Service List에 포함되지 않은 570개의 어휘가 담겨 있어요. 이 리스트는 대학에 들어가 무리 없이 학업을 하려면 알아야 하는 어휘로 구성돼 있어요. 분야에 관계없이 대학에서 사용하는 교재들, 논문들로 코퍼스를 구성하고 여기에서 빈도수와 가중치를 두어 뽑아 만든 리스트예요.

2,000개의 단어 밖에 혹은 570개의 단어 밖에 안된다고 착각하시면 안돼요. 위에서도 말했듯이 2,000개의 headword예요. 그 파생어와 굴절형들(과거형, 분사형, 현재형 등)에 대한 지식을 모두 포괄하는 2,000개예요.

다른 리스트들은 여기저기서 많이 찾아볼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미국 초등학교 K-2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필수 단어 리스트가 있어요. 이는 대규모 코퍼스가 만들어진 결과로 생겨난 부산물이기도 해요. 미국은 일반 출판사가 교과서를 만들지만, 교과서 집필 시 이 필수 어휘 풀(pool) 안에서 놀아요. 즉, 코퍼스가 있으면 그때부터 목적에 따라 코퍼스를 조정해가며 목적에 맞는 어휘 리스트를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워드 클라우드에서 텍스트를 긁어 넣으면 그 텍스트에 들어있는 단어를 빈도수대로 크고 굵게 인포그래픽스로 만들어 줘요. 프레젠테이션 용으로 좋아요. 10대들이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뭐 이런 걸 보여줄 때 좋겠지요? 무료니까 편히 쓰세요.

워드 클라우드에서 텍스트를 긁어 넣으면 그 텍스트에 들어있는 단어를 빈도수대로 크고 굵게 인포그래픽스로 만들어 줘요. 프레젠테이션 용으로 좋아요. 10대들이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뭐 이런 걸 보여줄 때 좋겠지요? 무료니까 편히 쓰세요.

코퍼스로는 영국의 BNC와 미국의 Brown Corpus가 유명하고, 코퍼스 소프트웨어로는 AntConc, WordSmith, Lextutor 등을 써요. (Lextutor는 일반인이 무료로 빈도 추출, concordance 추출, N그램 뷰어 기능 등을 쉽게 써볼 수 있어요.)

코퍼스에는 written corpus와 spoken corpus가 있고, written의 경우 문자를 코퍼스 안에 넣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spoken의 경우 voice-to-text 소프트웨어가 최근에 와서야 비교적 안정적인 성능을 내는 만큼, 예전 코퍼스는 죄다 녹음된 음성을 일일이 사람이 옮겨 적으며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비용을 들여 구축했어요. 이런 코퍼스들을 연구 목적으로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러나, 코퍼스를 상업적인 용도로 이용할 때는 반드시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돼요. 한동안 코빌드 사전이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던 이유가, 코퍼스를 기반으로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코빌드만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어서 그래요. 지금은 여러 코퍼스로 다양한 사전을 다양한 출판사에서 만들고 있어요.

영어에는 러너 코퍼스(learner corpus)가 있어요. 즉,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불어, 독어 등 몇몇 모국어권 사람들의 코퍼스가 있어서 이것을 돌려 학습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결과들을 뽑아낼 수 있다는 얘기예요. 롱맨 러너 딕셔너리 등을 보면 이런 러너 코퍼스에 기반을 둬서 러너들이 자주 틀리는 사례들이 주요 단어에 제시돼 있어서 아주 재미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영어 교과서를 만들 때 필수 어휘를 먼저 고르고 집필을 시작해요. 초등 필수 어휘가 800개 정도 되고, 중/고등 필수 어휘가 2,500개 정도 되는데 (여기에 외래어 등이 추가돼요), 이를 교육부가 지정해주면 집필자들이 교과서에 들어가는 어휘 75%를 이 리스트에서 가져다 쓰고 25%는 재량에 맡기는 식으로 집필을 해요. (어휘를 100% 정해 두면 창작할 때 운신의 폭이 너무 줄어들어 힘들어요.) 이때 코퍼스로 어휘를 뽑느냐 하면, 아직까지는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모국어 사전 지식 때문에 한글 코퍼스가 기준이 돼야 하는데, 아직 국어교육학자들이 학년별 필수 어휘를 뽑는 작업까지는 가지 못했어요. 또한, 어린이 영어 러너 코퍼스가 작게나마 구축돼야 하는데, 성인 영어 러너 코퍼스는 우리나라에도 몇십만 단어 수준으로 구축한 분들이 있으나 어린이 러너 코퍼스는 없어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더 중요한 것은 목적에 따라 코퍼스를 돌리는 방식을 조정해서 리스트를 다르게 뽑아낸다는 점이에요. 초등학생 필수 어휘를 만들고 싶다면, 초등학생들이 자주 보는 책, 초등학생들이 자주 보는 영상의 대본, 초등학생들의 작문 샘플, 그리고 초등학생들의 대화를 수집해서 이를 바탕으로 코퍼스를 별도로 구축해야 돼요. 스피킹 책을 만들고 싶다면, spoken corpus만 불러와서 거기에서 빈도수와 가중치를 둬서 리스트를 뽑아내요.

더 간단하게 얘기해 볼까요? 토익 빈출 어휘 리스트를 뽑으려면, 토익 기출 문제 텍스트를 전부 코퍼스 소프트웨어에 넣고 돌리면 빈출 어휘가 순위별로 쭉 나와요. 물론 1위는 정관사 the 겠지요. 그러면 가중치를 둬서 기능어들을 빼줘요. 토익 코퍼스라면 정말 작은 코퍼스인데, 이렇게 코퍼스를 돌려서 나온 토익 단어장이 없지요? 왜냐하면 토익 기출 문제 중 공개된 것은 얼마 안 되니까요. 기출 문제를 갖고 코퍼스를 만드는 건 ETS의 허가를 받아야 돼요. 기술이 없어서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저작권 때문에 못 만드는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빅보카>같이 만 개 단어를 모아둔 어휘 책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뽑았냐는 거예요. 시험 대비용? 시험 대비용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토익 코퍼스 따로 만들면 돼요. 대학 학업용? 이미 Academic Word List가 있어요. 취업용? 비즈니스 영어 코퍼스 따로 있어요. 코퍼스를 목적에 따라 만들어 거기서 맞는 리스트를 뽑아내는 거예요. <빅보카>는 무엇을 위해서 그 많은 단어들을 맹목적으로 암기해야 하는 건가요?

신영준의 &lt;빅보카&gt;

신영준의 <빅보카>

지금까지, 세상에는 이미 커다란 전체 코퍼스가 존재하고, 그것은 돈과 노력을 들여 십수 년에 걸쳐 구축한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봤어요. 이렇게 언어학자들이 해놓은 작업들이 있는데, 빅데이터를 돌린 것이 자신이 최초라고 말하면 안되는 거예요. 언어 빅데이터를 다루는 코퍼스 소프트웨어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공학자잖아요. 빅데이터 즉, 통계에 기반했다니까요. 그런 영단어 학습서는 없더라고요.”

신영준, 언론 인터뷰

언어학자들이 수십 년 전부터 코퍼스를 돌려 왔는데, <빅보카>가 최초로 빅데이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코퍼스의 유효성 문제도 심각해요. 코퍼스 중에는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것도 있어요. 그 코퍼스를 구축하는데 들어간 시간과 인력에 대한 존중도 있고요.

저작권 없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의 무료 영어 텍스트들, 몰라서 손쉽게 copy & paste 해서 소프트웨어에 넣고 돌리지 못하는 거 아니예요. copy & paste로 코퍼스라 부를 수도 없는 어휘 덩어리를 만드는 것, 참으로 날로 먹는 행위잖아요?

(편집자주: <빅보카> 사기극의 전말은 여기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는 14세기 고대 영어 베어울프부터 저작권이 풀린 1930년대 텍스트까지 있어요. 저작권을 포기한 현대 텍스트가 일부 있을 거고요. 21세기에 영어 공부하면서 옛날 영어 봐서 뭐하나요? 빈도가 잦다고 그걸 뽑아낸다 하더라도 그건 다른 뜻일 수 있어요. 16세기의 friend는 꼭 친구라는 뜻이 아닌데요. 그리고, 제가 번역해봐서 아는데, 19세기 영어만 해도 현대 영어와 매우 달라요. 제가 1920년대 작품인 <빨간 머리 앤>을 요새 영어 칼럼으로 쓰고 있잖아요? 거기 쓰인 영어만 해도 요즘이라면 절대 쓰지 않을 표현들이 굉장히 많아요. 일례로 dinner를 점심이라는 뜻으로 쓰거든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도 dinner는 점심이었어요. 저녁이 된 지 몇십 년 되지 않았어요.) 이런 영어로 코퍼스를 만들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거지요.

<빅보카>는 십몇 프로는 영화 스크립트를 넣었으므로 현대 영어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아뇨, 고작 십몇 프로 가지고요? 물론 그 스크립트들도 인터넷에 공개된 것 copy & paste 해서 가져왔겠지요.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이 비윤리성이었어요. 일반인도 아니고 리서치를 해본, 그것도 노벨상 수상자와 공동 논문이 있다고 자랑할 정도로 리서치를 해본 사람이, 남들이 피땀 흘려 코퍼스를 직접 만들거나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사용하고 있을 때, copy & paste 하나로 코퍼스라 부를 수도 없는 말뭉치를 뚝딱 만들고, 그걸 돌려서 우리나라 최초로 빅데이터로 만들었다고 선전하는 비윤리성이요.

우리나라에 성인 영어 러너 코퍼스가 있다고 했지요? 이거 동국대 경주 캠퍼스에서 강의하던 원어민 교수가 6년을 넘게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 작문 샘플을 모아서 만든 게 있더라고요. 제가 그 분 발표를 들었을 때 이십 몇만 단어의 코퍼스였죠. 남들은 손쉬운 거 모르고, copy & paste 할 줄 몰라서 코퍼스를 그런 식으로 안 만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학문이란, 기본적으로,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다른 연구자들의 피와 땀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연구자가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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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별 어휘 size를 측정하는 테스트는 페이스북 앱으로도 많이 보셨을 거예요. 이것은 이제 특별한 기술도 아니니까요. 이 분야의 대가는 뉴질랜드 웰링턴 빅토리아 대학의 폴 네이션(Paul Nation) 교수입니다. 여기서 어휘 테스트를 무료로 할 수 있고, 한국어로 번역된 버전도 있어요. 한 개인의 어휘 size 테스트는 엄청난 데이타베이스의 통계치로 나오는 결과예요. 보면 총 140개 문제가 나와 있어요. 10개씩 14개 그룹으로 묶여 있는데, 한 그룹당 제목이 first 1,000이라 쓰여 있어요. 이건 무슨 의미냐면 1,000개의 기본 어휘 실력을 측정하는 10개의 문제라는 뜻이예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10개의 문제 중 특정 문제를 맞혔을 때, 배경으로 혹은 사전 지식으로 이미 어떤 어휘도 알고 있는지가 측정되는 원리예요. 그래서 10개의 문제만 가지고도 첫 번째 1,000단어 (전문가들은 Band 1 어휘라고 불러요) 중 얼마만큼을 아는지 결과치를 줄 수가 있는 거예요.

2. 어휘 지식의 Depth

어휘 지식의 깊이(depth)를 관찰하다 보면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거예요. “어휘 지식의 size는 어휘 지식의 depth와 정비례한다.” 이건 어휘를 많이 아는 사람이 어휘 지식의 깊이도 깊다는 뜻이에요. 이게 왜 놀랍냐고요? 당연한 말이라고요? 한국어 어휘는 우리도 그래요. 책 많이 읽고 국어 잘하는 사람들이 어휘량도 풍부하고 어휘도 이모저모 그 맛을 살려가며 잘 써요. 저 진술은 모국어 어휘에 대해서는 정말로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이 영어 어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보면 바로 저 진술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돼요. Vocabulary 22,000, 55,000, 77,000을 넘어 수많은 어휘들을 달달 외워서 어휘 지식의 size는 엄청나게 키워놓았는데, 그러면 이렇게 학습한 어휘들을 잘 쓸 수 있느냐 하면 아니잖아요. 수많은 어휘들을 알아도 그걸 말로 또는 글로 못 쓰잖아요. 이게 바로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공부할 때 가장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어휘 지식의 size만 거대하게 키워놓는 거죠. 그래프를 그려보면 가로축으로는 넒게 퍼져 있는데, 세로축으로는 얄팍한 기형적인 그래프가 나와요.

우리나라 영어 학습법의 문제는 어휘를 잘못 학습하는 데에 있다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예요. 대체 왜 어휘를 수십 개씩 한국어 뜻풀이만 (품사라도 같이 알고 있는 학생을 만나면 정말 고마운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달달 외운 걸로 어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렇게 외운 어휘는 써먹을 수 있나요?

물론 정말 초보자인 경우에는 ‘어휘 홍수(vocabulary flood)’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저명한 영어교육학자인 스티븐 크라셴이 말하기는 했죠. 초기에는 생존을 위해 알아야 되는 어휘들이 있어요. 단어 하나라도 던져야 살아남으니까요. 그러나 한국인은 공교육에서 최소 10년은 영어를 해서 이 상태는 아니예요. 그래서 아마 다들 아실 거예요. 단어 뜻 하나를 안다고 문장의 뜻을 아는 건 아니라는 것을요. 오늘 아침에만 해도 페이스북에 영어학습 앱 광고가 지나갔어요. 안구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단어별로 색이 달라지며 쭉쭉 달리는 것을 구현해놓은 앱이었는데, 조금만 어려운 단어로 가도 작은 창이 뜨며 한국말로 한 단어 뜻이 떠요. 마침 거기 나온 문장이 “I'm flattered.”인데 ‘flatter’의 뜻이 ‘아첨하다’라고 떠요. 그런데 저 문장의 뜻이 “나는 아첨받고 있어요.”인가요? 아니잖아요.

어휘를 학습할 때 뜻만 한두 개씩 외운 학습자들이 독해 지문을 만나면, 뜻 한두 개를 아는 단어들이 여기저기 포진해 있는 암호문을 받아들고 상상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드문드문 존재하는 의미의 점들을 상상력의 선으로 이어 의미의 선으로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 거라고 추론하고 있어요. 이건 독해가 아니에요. ‘Connecting dots to make lines’는 스티브 잡스가 삶의 기회들이 어떻게 역동적으로 이어지는가를 표현한 것이지, 독해는 그렇게 이루지지 않아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봤어요. 수능 독해 스타일의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지요. 모르는 단어에 밑줄을 그으면서요. 결과요? 수천 번 수능 지문 독해 훈련을 받은 학생들은 지문 아래에 주어진 객관식 문제들을 얼추 맞히더라고요. 그런데 지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한국어로 얘기해 달라고 하면, 객관식 문제를 맞힌 학생들의 대략 1/3만 설명할 수 있었어요. 이것은 학생들 중 다수에서 어휘 지식이 reading comprehension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어휘 리스트만 주는 것은 어휘 학습이 아니예요. 교수자 입장에서는 어휘를 어떻게 제시하느냐(how to present vocabulary)의 문제예요. <빅보카>의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일반인들이 가장 공감한 부분이 아마 예문이 없다는 점일 거예요. 이 지적이 바로 어휘 지식의 깊이와 직결된 문제예요.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예문이 없다’는 설명만 일반인들이 알아듣는구나 하고 좌절하는 포인트이기도 해요. 역설적으로 이것은요, <빅보카>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다수 어휘 학습 방법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장이거든요.

어휘 학습은 단어만 제시하고 그 뜻 한두 개만 제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어휘 지식의 깊이라는 용어를 다시 가져와 설명하면, 이건 너무나도 피상적인 지식의 깊이예요. 이 깊이로 독해를 커버하려니까 안되는 거예요. 이 지식의 깊이로 사용을 하려니까 안되는 거예요.

제가 TESOL 박사과정을 밟던 중에, 국내에서 열린 국제 학회에 어휘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셰릴 짐머만 교수가 왔었어요. 옥스포드 출판사에서 나온 Q Skills 시리즈 2nd edition을 보면 저자들 외에도 다른 이름이 적혀 있는데, vocabulary consultant가 셰릴 짐머만이에요. 어휘를 수업에서 어떻게 처치하는가를 단적으로 보고 싶으면 이 책에서 어휘를 어떻게 제시하고, 그 exercise를 어떻게 돌리는지만 분석해도 알 수 있어요. 실제 영어 교사 교육에서 이런 수업을 해요. 맨날 보던 교재인데 그 아래 설계가 어떻게 돼 있는지 보는 눈이 영어 교사에게 필요해요. 이것이 곧 수업을 어떻게 설계하는가와 직결되기 때문이에요.

짐머만 교수의 강연에 대략 5, 60명 정도의 원어민/한국인 전공자들이 앉아있었는데, 이들에게 짐머만 교수가 big, enormous, gigantic, huge, large의 5개 단어를 주면서 크기 순으로 나열하라고 했어요. 전공자들의 답은 완전히 일치했어요.

big < large < huge < gigantic < enormous

크기대로 ‘크다’ 형용사를 나열하는 지식, 이것은 사실 어휘 지식 중에 가장 고급에 속해요. 가장 깊은 깊이까지 도달한 수준의 지식이지요. 여기에서 두 가지 이슈를 도출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저것보다 낮은 수준의 지식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 하나는 어떻게 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가예요.

첫 번째, 어휘 지식의 깊이, 그 첫 단계는 물론 어휘의 의미(뜻)를 아는 것이에요. 그리고 철자와 발음을 아는 것. 이건 굉장히 피상적인 지식이에요. 뜻, 철자, 발음을 넘어서면 품사(part of speech)가 있고, 동사의 경우 굴절형(과거형, 분사형 등)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파생어(같은 word family에 속하는 명사형, 형용사형, 동사형 등) 지식도 필요하고, 반의어와 동의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해요. 더 나아가서는 denotation(명목상의 의미)과 connotation(뉘앙스)으로 올라가요. 여기에 지식이 확장돼 얽히면서 collocation(연어)에 대한 지식과 그 단어의 cultural reference 등이 등장하고, 화용론적 지식(어떤 social context에서 쓰거나 쓰지 말아야 함을 아는 지식)이 더해져요. 이만큼을 다 알아야 하지만, ‘이걸 처음 어휘를 배울 때 다 제시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그건 아니예요. 처음에 제시하는 방법은 word list 방법이 맞아요.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word list만 주고 끝내서 문제인 거예요.

두 번째, 어떻게 저 수준까지 깊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 사실 답은 분명해요. 수천 번 컨텍스트 안에서 만나기(encounter with the input)예요. 원서를 많이 읽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천 번씩 만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원어민들이 쓰는 방식이고 교수법은 아니예요. (다독을 운영하고 감독하는 교수법은 있지만 다독 자체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예요.) 그렇다면 어휘를 수업 시간에 효율적으로 가르치고 싶다, 혹은 어휘 교재를 쓰고 싶다, 그러면 효율적인 과정의 설계라는 이슈가 등장해요. 셰릴 짐머만이 컨설팅을 한 책을 보면서 이런 설계를 뽑아내야 하는 거예요.

이런 식이에요. 첫 단계에는 단어를 뜻과 함께 제시해요. 5과 정도 지나면 앞에 나왔던 단어들을 모아서 이 단어들의 다른 측면을 건드려줘요. 파생어로 테이블 묶기같은 방법이 있겠죠. 다음 단계 지문으로 넘어가 이 단어들의 뉘앙스를 건드려줘요.

즉, 어휘 지식의 깊이를 보장하는 방법은 revisit,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만나기예요. 지식의 발전은 항상 재방문 나선형 계단이라고 생각해요. 그 단어를 다시 만나되 한 계단 위에서 만나기 작업을 하는 것이죠. 즉, 뜻만 알았던 단어의 다른 측면을 건드려주며 계속 그 단어를 재방문하도록 수업이나 교재를 설계해야 돼요.

그저 다독을 통해 이 길을 걸으면 높낮이가 중구난방인 입력이 무작위로 들어오고 간격도 제멋대로지만, 수업과 교재를 설계할 때는 재방문의 방식과 빈도를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어요. 지름길을 알려준다고 할까요.

어휘만 단순히 제시하는 학습서를 제대로 된 학습서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어휘를 뽑는 것 하나만으로 학습은 끝나지 않아요. 다른 측면을 건드려주는 과정을 면밀하게 설계해서 제공해야 비로소 학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에요.

3. 어휘 교수법

우리는 어휘를 어떻게 가르치나요? 일단 어휘 리스트를 만들고 수업 시간에 제시하고 (주로 철자 보여주고 발음과 뜻을 알려주고) 그리고 단어 시험을 보지요. 여기서 도출되는 어휘 교수법은 두 가지, 즉 어휘 리스트를 만드는 법과 어휘를 처치(제시)하는 법이에요.

어휘 리스트를 만드는 법은, 학습자 입장에서는 대개 몇십 단어를 표로 받지요. Bilingual word list라 불리는 이 표는 영어 단어(entry)와 그 뜻으로 구성돼 있어요. 학습자 눈에는 이것만 보이고, 많은 교수자들도 이게 전부인 줄 알아요. 그러나 이 word list에는 훨씬 더 복잡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어요.

한 권의 교재로 한 학기 동안 진행되는 수업에서 어휘를 가르치려고 해요. 그럼 학생들에게 제시할 어휘는 어떻게 뽑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단하게 생각해요. ‘교재 지문에서 뽑지!’

‘그런데 이 교재를 쓴 사람들은 이 어휘를 어떻게 뽑았지?’ ‘이 어휘가 이 학생들 수준에 맞는지 어떻게 알지?’ ‘이 어휘를 어떤 순서로 가르치지?’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이제 복잡해지기 시작해요.

물론 교과서를 집필할 때는 교육부가 정해놓은 필수 어휘가 있지요. 미국 교과서의 경우에는 학년별로 구축돼 있는 거대 코퍼스에서 뽑는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럼 최소 수백 개의 어휘를 어떤 순서로 가르치는 게 좋을까요? 여기부터 과학과 실험이 들어가요. (물론 코퍼스도 이미 과학이고요.) 물론 노련한 교사는 오랜 경험에 비추어 몇 살 정도의 아이가 어느 정도의 어휘력이 있고, 뭘 알고 뭘 모르는지 대충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감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지요.

어휘를 제시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형태소 단위(morphemic set)로 묶는 법, 두 번째는 의미론 단위(semantic)로 묶는 법, 세 번째는 (헐거운) 주제 단위(thematic set)로 묶는 법이에요.

(1) 형태소 단위로 제시하는 방법은 조상님 시절의 vocabulary 방식이에요.

gleam, glint, glisten, glare, glitter, glow

이런 식으로요. 다 ‘빛나다’라는 명목상의 의미(denotation)를 갖고 있는 단어예요. 뉘앙스(connotation)는 다 달라요.

이 방식은 고급 학습자들한테 맞는 방법이에요. 어근과 접사를 이용해서 제시하는 것도 여기에 속해요. 이렇게 어휘를 제시하면 초/중급 학습자들은 철자의 미묘한 차이로 뜻과 용법이 달라지는 이 단어들이 혼란스럽기만 해요. 그러니까 이 방식은 배울 만큼 배운 다음, 기존에 배운 것을 묶어서 정리할 때나 유효해요.

(2) 의미론 단위로 제시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해요. 교수자나 교재 집필자들도 힘이 덜 들고요. 보통 이런 식이지요. ‘오늘은 요일(days of the week)을 가르치자.’ 이렇게 주루룩 늘어놓고 가르쳐요.

Monday, Tuesday, Wednesday, Thursday, Friday, Saturday, Sunday

‘오늘은 신체 부위를 가르치자. 각 부위를 가리키며 노래하면 그게 영어 수업이지.’

head, eyes, ears, knees, toes, arms…

이 방법은 문제가 있어요. 아이들을 가르쳐 본 선생님들은 아실 거예요. 요일 단어의 스펠링을 너무 어려워한다는 걸요. 아이들은 보통 Tuesday와 Thursday를 헷갈려해요. 성인들도 일곱 단어를 처음 익히려면 쓰여진 대로 읽지 않는 철자가 많아서 헷갈려요.

영어교육학자들은 이 문제를 학습자의 수준에 맞지 않는 인지적 부담(cognitive burden)으로 봐요. 인지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오늘은 요일을 배우자”하고 7개를 한꺼번에 주루룩 제시하는 대신에, 가장 빈도수가 높은 단어 두 개 정도만 오늘 제시하고 (코퍼스를 돌려 빈도를 조사해보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요일은 Friday예요. 그 다음이 Sunday고요), 내일 또 두 개 정도 제시하고, 그러다 몇 개 과가 지나서 요일들을 다 커버하면 그때 7개를 다시 불러와서 달력에 채워넣으며 정리해요.

(3) 주제론 단위로 제시하는 방법이 가장 효율성이 높다고 실험 결과들은 말하고 있어요. 이건 우리 뇌가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집어넣는 방식과 관련이 깊어요. 저는 이렇게 해요.

(i) 먼저 그림 어휘(imageability vocabulary)로 단어를 보여줘요. dark, monster, run, hide와 같은 단어를요.

(ii) 그리고 만화를 보여줘요. “어두워져요. 괴물이 와요. 달아나서 침대 밑에 숨어요.” 이걸 대사 없이 그린 만화를 보여줘요.

(iii) 다음엔 만화에 영어 녹음을 넣어서 저 문장들을 들려줘요.

(iv) 만화에 영어 자막을 넣어 보여줘요.

(v) 만화 빼고 글만 보여줘요.

어른의 경우에는 이런 식이에요.

“여행(travel)을 가려고 해요. 여행사(travel agency)를 알아봐요. 거기서 여행 상품을 살펴보고 목적지(destination)를 정해요. 비행기 표를 끊고(ticketing) 호텔을 예약해요(reservation).”

상관 관계가 크지 않은 단어들을 이야기 안에 헐겁게 묶어서 제시하는 방법이에요. 사람의 뇌는 이렇게 엮이는 후크(hook)가 있을 때 새로운 정보를 장기 기억에 잘 넣어요.

4. 어휘 학습법

우리나라의 영어 어휘 학습은 지식의 size를 넓히는데 치중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지식의 depth 측면에서는 단어의 뜻과 발음, 품사 정도의 아주 피상적인 지식만 보유한 채로요. 그렇기 때문에 어휘가 수용적 지식(receptive knowledge)에만 머물고 표현적인 지식(productive knowledge)으로 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왜 writing과 speaking이라는 표현적 기능(productive skills)으로 안 나오겠어요? 지식의 층위가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어휘 뿐만 아니라 어떤 지식도 수용적 지식으로 들어가서 층위를 계속 쌓다가 어느 지점을 넘어서야 표현적 지식으로 나와요. 다시 말하면, 내가 내 말로 풀어낼 수 있는 지식이 진정한 나의 지식이에요.

어휘 지식의 깊이를 더하는 방법은 수천 번이고 그 어휘와 다양한 문맥에서 만나는 것 (exposure)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사실 궁극적인 학습법은 다독(extensive reading)이에요. 다청(extensive listening)은 안되냐고요? 돼요. 다만, 음성 정보는 음성이 처리되는 물리적 시간의 한계에 갇혀서 문자 언어의 처리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요. 소리내어 읽기를 시키면 아주 잘 읽는 원어민도 1분에 153단어 정도밖에 못 읽어요. 그러나 묵독(silent reading)을 하면 원어민 대학생이 1분에 평균 800-900단어를 읽어요. (아주 빠른 사람은 1분에 3천 단어를 읽기도 해요.) 그래서 묵독으로 exposure를 늘려주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에요. 인간이 정보를 전달할 때 온갖 감각 정보를 다 제거하고 문자(시각 상징)로 환원해서 전달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그게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에요. 어마무시한 정보 전달을 가능케 하니까요.

다독한다고 아무 영어책이나 읽으면 안돼요. 물론 특별히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도 그걸 읽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서 책을 골라 읽어야겠다면 내 수준에 맞는 영어책을 읽어야 돼요.

내 수준에 맞는 영어책은 어떻게 결정하냐고요? 정석은 리딩 지수(reading index)를 사용하는 것인데, 렉사일(Lexile) 지수나 AR 지수가 그 예에요. 그러나 이 지수들은 기관에서 유료 프로그램을 돌려서 측정할 수 있고요. 이런 게 없을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1) 모르는 어휘가 2%를 넘지 않는 책을 선택한다

100개의 단어 중 2개만 모르는 수준의 책을 골라야 해요. 왜냐면 100개 중 2개만 모르는 수준이 바로 원어민 읽기 수준인데, 이것이 바로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그 뜻을 문맥으로 유추해서 알 수 있는 수준이에요. 우리가 한글로 된 책이나 신문을 읽을 때 어쩌다 모르는 단어를 만나도 국어사전 찾아가며 읽나요? 모국어로 쓰여진 글에서 모르는 단어는 주변 문맥으로 어떤 뜻인지 충분히 알아내요. 노출(exposure)에 의한 어휘 학습은 이렇게 문맥으로 추측할 수 있는 수준의 책으로 하는 것이 이상적이에요.

다독을 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더라도 멈춰서 뜻을 찾는 건 하지 마세요. 다독시에만 그래요. 정말로 중요한 키워드라서 이걸 모르면 사건 진행이 이해가 안되는 경우에만 찾으세요. 되도록이면 그냥 연필로 표시해놓고 지나가고 다 읽은 다음에 뜻을 찾아보세요.

읽다가 모르는 단어를 보고 멈출 때마다 이해의 끈(comprehensional thread)이 끊어져요. 이 끈은 몇 번 이상 끊어지면 복구되지 않기 때문에 글을 다 읽고도 이해할 수가 없게 돼요. (모르는 단어가 많은 지문을 독해할 때, 단어를 일일이 찾아가며 끝까지 읽었는데 지문의 내용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은 경험 있으시죠?) 지문의 내용을 파악해야 그다음 사고 기술인 요약해서 말하기(summarizing), 다른 말로 말하기(paraphrasing)가 가능한데, 우리나라의 영어 수업에서는 최상급반이 아니면 이런 사고 기술을 왜 활용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시지요?

100단어를 읽을 때 다섯 번 이상 멈추면 이해의 끈은 끊어져서 복구되지 않아요. 이해(comprehension)하기 위해서 읽는 것인데, 이렇게 이해의 끈이 다 끊어지면 리딩의 목적이 사라지는 거예요. 정리하면, 아는 단어 98%가 이상적인 다독 환경인 pleasure reading의 수준, 아는 단어 95%가 independent reading이 가능한 수준, 아는 단어 85%는 guided reading(도움 읽기)가 가능한 수준이고, 아는 단어가 85%도 안되는 경우는 좌절감만 들게 하는 수준이에요.

2) Graded readers를 선택한다

서점의 일반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trade books라고 불러요. Trade books는 읽기의 난이도를 가늠하기가 힘들어요. 아동, young adult, 성인 등으로 연령대별 난이도만 대충 짐작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아예 어휘와 지문의 난이도를 통제해서 단계별로 만들어 놓은 graded readers를 찾아서 읽는 방법이 있어요.

Graded readers는 어린이용도 있지만,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는 14세 이상 성인용도 있어요. 어린이용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ORT(Oxford Reading Tree)예요. 그밖에도 I Can Read, Dolphin Readers 등이 있어요. ORT가 뛰어나기는 한데 저는 Dolphin Readers도 참 좋았어요. 이 리더스 시리즈들은 영어가 모국어인 아이들의 문자 습득을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책에 쓰인 지문과 귀로 듣는 지문이 달라서, 책의 지문에는 정말 핵심만 나오고, 귀로 듣는 건 그보다 더 많은 정보가 나와요. 음성 언어 input을 바탕으로 문자 언어로 들어가는 원어민 아이들에게 안성맞춤이지요. 외국어로서 영어를 익히는 아이들은 원어민 아이들과 이 시리즈에 들어가는 문턱이 달라요. 음성 언어로 영어를 알고 있는 지식이 전혀 다르니까요. 그래서 학습 경험과 효과가 차이날 수밖에 없는데, 그 격차는 그냥 감수하고 쓰는 거예요.

우리나라 대학 신입생들, 수능 3등급 정도의 학생들은 대략 미국 초등학교 2, 3학년 수준으로 읽어요. 그러니 그 수준의 동화를 골라서 읽어도 되긴 해요. 그런데 인지 발달은 성인이라 미국 초등학생들이 읽는 동화가 참으로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거든요. 재미가 없다는 것은 인지적으로 도전이 되지(cognitively challenging)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 성인용 graded readers가 좋은데, 옥스포드의 bookworms가 대표적이에요. 펭귄이나 롱맨 등에서 나온 리더스도 있고요. Bookworms의 starters 시리즈는 영어는 쉽고 글밥은 적으면서 만화 수준의 삽화가 나오지만, 죄수가 탈옥하는 것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요.

Graded readers의 또다른 장점은 리딩 실력이 향상돼 가는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나한테 맞는 단계를 골라서, 그 단계에 속하는 책을 여러 권 읽고 실력이 향상돼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체험을 하고 싶다면 graded readers를 추천드려요.

5. 고급 어휘 학습법

어휘를 그냥 연습장에 쓰면서 암기하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는지요? 혹시 이런 방법은 써보셨나요?

“단거(danger)는 위험하다.”

Danger를 외우기 위해 영어 음가와 비슷한 한국어 단어를 가져와 연상의 고리로 삼는 방법, 유치하다고 생각하셨지요? 이는 키워드 방법(keyword method)이라고 불리는 학습법 중 하나입니다. 유치하다고 여겨서 이런 방법을 쓰는 걸 숨기는 분도 계신데요. 초급 단계에서는 좋은 방법입니다. 일단 생존하기 위해 최소한의 어휘를 확보하는 게 필요해서 그래요.

중학생 중 최상위, 고등학생 중 상위, 그리고 대학생/일반인 정도가 되면 다른 방법으로 어휘를 조직하고 암기해야 합니다. 영어는 80% 정도가 외부에서 들어온 차용어(borrowed words)고, 그중 75% 이상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들어온 말입니다. 피부에 와닿는 생활어는 앵글로색슨인들이 쓰던 영어가 남아있지만, 조금이라도 추상적이 되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온 어휘들이 등장합니다. 학문에 필요한 웬만한 개념어들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비롯됐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어근(root)과 접사(affix: 접두사(prefix)와 접미사(suffix)가 있지요)를 활용해서 어휘를 확장시키는 것이 굉장히 효율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영어 단어를 어근과 접사별로 깔끔하게 차트로 정리해 제시하는 교재와 강사들은 많아요. 하지만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교수법을 모르는 겁니다. 어휘 리스트를 제시하는 것은 어휘 교수법의 첫 단추일 뿐이니까요.

어휘 교수법은 어휘를 제시한 후, 어휘가 큰 노력 없이도 외워지는 학습 과정을 만들고 그 안에 학생들을 넣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보여드릴게요.

(i) 어근과 접사를 제시만 해요.

(i) 어근과 접사를 제시만 해요.

(ii) 단어들의 의미를 알아내게 해요.

(ii) 단어들의 의미를 알아내게 해요.

(iii) 빈 칸 채우기를 하면서 의미 변별 훈련을 해요. 유추, 비교, 대조, 분류 등의 사고 기능을 쓰면서요.

(iii) 빈 칸 채우기를 하면서 의미 변별 훈련을 해요. 유추, 비교, 대조, 분류 등의 사고 기능을 쓰면서요.

(iv) 단어의 품사를 확인하게 해요.

(iv) 단어의 품사를 확인하게 해요.

(v) 이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 수 있는 ‘표현적 지식’으로 확장해요.

(v) 이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 수 있는 ‘표현적 지식’으로 확장해요.

(vi) creative writing을 통해 창의적 확장까지 가요.

(vi) creative writing을 통해 창의적 확장까지 가요.

예로 보여드린 어휘 교재는 원어민 5, 6학년용이에요. 외국어로 학습시 중간 과정을 더 세밀하게 하고 (vi)과 (v)는 부담스러워서 빼기도 해요.

다양한 사고 기능을 통해 한 어휘 아이템의 여러 측면들(어근, 접사, 의미, 품사 등)을 건드리며 만나는 과정을 만들어주는 게 핵심이에요! 학생들은 이렇게 연습 문제를 풀거나 수업내 활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단어들이 외워져요. 그냥 어휘 리스트만 던져주고 “한 시간에 20개를 외우는지 어디 한번 보자. 몇 개 이상 틀리면 집에 못 간다”는 식으로 협박하는 것을 교수법이라 착각하면 안돼요.

이렇게 어근과 접사를 이용하면 하나하나 따로 외울 때보다 어휘를 훨씬 더 확장할 수 있어요. 그래서 고급 학습자용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이제 의미의 망을 그리기 시작해요. 한 단어의 뜻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것을 알게 되면, 먼저 그 단어의 원형적인 의미를 머릿속에 그린 다음 이 원형적인 의미에서 가지를 쳐서 여러 가지 뜻을 하나의 망으로 그려 넣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뇌는 기존에 알고 있는 것과 엮여야 장기 기억에 잘 넣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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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appreciate라는 단어를 보면 일단 어원 사전을 찾아봅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왔어요. ‘ad’ (to라는 의미의 접사로서 뒤에 오는 자음과 동화하여 ac, ap, ar 등으로 변형돼 사용돼요)와 price라는 의미의 어근 ‘pretium’이 합쳐진 것으로서, ‘가격으로’ ‘가격을 정하다’ ‘가치를 정하다’는 뜻으로 영어로 들어와 이후 뜻이 파생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이 단어의 원형적인 의미는 ‘어떤 것의 가치를 정하다/알아주다’임을 알 수 있어요. 영영 사전을 보며 이를 확인해봅니다.

원형적인 의미를 파악한 다음에는 영한 사전을 봅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정확한 번역어를 제시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지만, 학생이 굳이 볼 필요는 없어요. 외려 학생들은 한국어 번역어의 틀에 갖혀서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 머릿속의 이 번역어들을 건져내 학생들이 기존 지식에 새로운 해석을 연결할 수 있돌고 할 필요가 있어요.

어떤 것의 가치를 알아주다라는 원형적인 의미에서,

(i) 누군가의 도움의 가치를 알아주면 ‘감사하다’가 되는 거고,

(ii) 어떤 예술 작품의 가치를 알아주면 ‘감상하다’가 되는 거고,

(iii) 어떤 사람, 상황, 사물의 가치를 알아주면 ‘인정해주다’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I'd like to work where I’m fully appreciated (나는 내 가치를 온전히 알아주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iv) 비스니스 용어로 환율을 말할 때는 ‘가치가 오르다’는 뜻으로 쓰여요.

결국, 원형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다른 뜻은 줄줄이 그 의미의 망 안에 넣습니다. 이게 효과적으로 암기하는 방법이에요. 이 단계까지 오면 바아흐로 혼자 어휘를 학습하는 단계까지 온 겁니다.

요즘에는 다양한 기술들이 이 과정을 도와줍니다. 이제는 학습자별로 망각 곡선을 그려서 이 학습자가 이 단어를 잊어버릴만한 때쯤 AI가 그 단어를 다시 쏴주는 세상이에요. 이미 수만 명의 학습자들의 어휘 테스트 수치가 분석돼서, 특정 어휘를 아는 사람은 사전 지식으로 어떤 어휘들을 알고 있는지 통계가 나와요. 그래서 어휘 테스트 몇 개만 풀게 하면 이 학습자는 어떤 패턴으로 학습한 내용을 망각할 지가 예측되고, AI가 그 주기에 맞춰서 재학습시킬 수 있어요.

자, 이제 어휘 학습에 대해서는 알려드릴 만큼 다 알려드린 것 같아요. 강연에서 말로 전달하면 더 쉬운데, 문자의 한계상 더 쉽게 설명할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그럼, 여러분의 어휘 학습 ‘과정’을 축복합니다!

부록. 어휘 학습에 대한 흔한 오해들

1. 영영 사전을 봐야 한다?

흔히 영영 사전(monolingual dictionary)과 영한 사전(bilingual dictionary) 중 영어 학습을 잘하려면 영영 사전을 봐야 한다는 믿음이 있지요?

그런데, 최고의 사전 리서치는 종결되었어요. 이 말인즉슨 최고의 사전에 대한 연구는 이미 학자들 간에 의견의 일치가 이뤄져서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수천 편의 논문을 통해 학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는 이러한 믿음이 틀렸다는 거예요. 영영 사전을 보면 단어의 definition을 읽다가 그 안에 또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인지적 부담이 더해지는 역효과가 발생해요. 그래서 많은 이들의 믿음과 달리 영영 사전은 학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최고의 사전은 이중어 사전(bilingualized dictionary)이에요. 이는 영한 사전(bilingual dictionary)과는 또 달라요. 이중어 사전은 검색하는 영단어의 뜻을 우선 한국어로 제시한 다음 예문을 영어로 제시해요. 모국어로 뜻을 제시하면 한 큐에 이해가 될 것을 학습자가 뜻을 파악하느라 멀리 헤매고 다니는 인지적 부담을 줄일 수 있어요. 자세한 내용은 이 칼럼을 참고하세요.

이중어 사전의 구조

이중어 사전의 구조

2. 모르는 어휘의 뜻은 문맥(context)에서 미뤄 짐작하는 방법이 최고다?

모르는 어휘의 뜻을 context clue로 알아내는 전략은 원어민 수준에서나 성공률이 높은 전략이에요. 우리도 한글로 쓰인 글을 읽다가 어쩌다 모르는 어휘가 나와도 사전 찾아보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요. 그냥 주변 문맥으로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으니까요. 원어민 수준이라함은 얼추 말해서 100 단어 중 모르는 단어가 한두 개인 경우를 말해요. 이 정도 수준은 돼야 처음 보는 단어의 의미를 문맥에서 유추하더라도 맞힐 확률이 높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얄궃게도 문맥에 대한 의존도는 고급 학습자보다 초급 학습자가 더 높아요. 고급 학습자는 사전 배경 지식을 많이 쌓아둬서 문맥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초보 학습자는 그렇게 찍어봤자 성공할 확률이 낮아요.

영어 실력이 늘수록 문맥으로 어휘의 뜻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요. 그러니 ‘문맥으로 어휘의 뜻을 파악해야 영어가 는다’고 말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전도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거예요.

문맥에서 어휘의 뜻을 유추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는 있어요. 단, 학습자 수준에서 능히 유추에 성공할 만한 어휘를 선별해서 가르쳐야 해요.


Joyce Park : 서강대학교 및 동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석사까지 전공한 후, 영국 University of Manchester의 CELSE(교육대학원)에서 TESOL을 전공,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TESOL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대학에서 교양영어를, 다른 교육기관에서 영어 교수법과 영문학을 가르치고, 기업체에서 다양성(Diversity) 강연을 하고 있으며,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이 바뀌어야 하고,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문학과 종교밖에 없다고 믿으며 삶을 허위허위 노 저어 가고 있다. 책벌레로 살다 보니 세상을 거대한 텍스트로 읽어내려 하고 삶을 개인이 쓰는 서사라고 착각하는 치명적인 결점을 기꺼운 마음으로 지니고 산다. 지은 책으로는 『내가 사랑한 시옷들』,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과 『하루 10분 명문 낭독 영어 스피킹 100』을 비롯한 십여 권의 영어학습서와 영어 동화 시리즈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그렇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와 『로버랜덤』을 비롯해 십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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